신라(新羅)의 시조왕(始祖王)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탄강(誕降)하신 곳을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운 곳이다.

서기 기원전 70년, 그 때에는 지금의 경주가 진한(辰韓)땅이었는데 고조선(古朝鮮)이 망하자 그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경주 부근의 바닷가나 산 속에서 6개의 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이금은 없었고 촌장(村長)들만이 있었다.

이를 걱정하던 촌장들은 3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양산(楊山) 쪽을 바라 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나정(蘿井)에서 오색(五色)의 구름 속에 용마(龍馬)가 크게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선인(仙人)한 사람이 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박과 같이 생긴 포(胞)가 하나 놓여 있어서 깨 보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기가 후일에 시조왕이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동천(東川)으로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모양은 예쁘고 단정하게 생겼는데

 옆에 있던 새나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어 아기의 탄생을 즐거워했다. 

나이 13세가 되니 어른같이 숙성(熟成)해지자 6촌장들이 추대(推戴)해서 왕으로 모셨다. 

나정의 비문은 경상도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경주부윤(慶州府尹) 최중헌(崔重獻)이 

제목 글자와 비석의 글자를 썼고 후손들이 돈을 내어 세웠다. 

사진은 1997년에 촬영한 모습이고 현재는 나을신궁(奈乙神宮) 복원(復原) 공사를 위해 

비각을 헐어낸 뒤이 일대가 대대적인 발굴(發掘)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1975년 11월 20일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었다.